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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홍삼이야기 Ginseng&Red Ginseng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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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의 약효

인삼이 한국의 대표적인 수출품이 되었던 까닭은 탁월한 약효 때문이었다. 인삼은 독성이 거의 없고, 만병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사포닌(Saponin), 진세노사이드(Ginsenoside) 등의 성분을 함유 한 인삼은 심장 등 오장(五臟)을 보호하고 정신을 안정시키며, 눈을 밝게 하고, 또 오래 복용하면 몸 이 가벼워지고 오래 살 수 있다고 알려져 왔다. 실제로 인삼의 신진대사 촉진 작용, 진정작용, 혈당강 하, 면역력 향상, 암세포 억제, 피로 회복, 노화 방지 등 다양한 효능은 현대 의학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고려의 홍삼

고려는 송나라 등과 활발한 무역을 했는데, 고려시대에 한번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은 1,000근이나 되었다. 송나라 뿐 아니라 아라비아, 동남아 여러 나라와도 활발한 교역이 이루어졌는데, 고려에 온 아라비아 상인들은 그들의 토산품을 바치고 고려 인삼을 교역 했을 것이다. 원나라 황제들도 고려의 인삼을 대단히 좋아했다.

고려 시대에는 인삼을 장기간 보존할 수 있는 홍삼 제조기술이 등장했다.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인삼에 관해 “여름을 지나면 좀이 먹으므로 쪄서 익혀 오래 둘 수 있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여, 인삼을 쪄서 만든 홍삼 제조 기술이 이미 개발되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2010년 2월, 천성산 관음사 목조보살좌상(1502년 만들어진 조선의 불상)의 복장유물(腹藏遺物)에서 약 1,000여년 전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삼이 발견된 바 있다. 복장유물이라 함은 불상을 만들 때 불상 안에 넣는 불경공예품, 각종 보석류와 같은 문화재를 일컫는 말인데, 오래된 홍삼이 귀한 것이다 보니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불상 안에 넣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인삼의 대량 재배

인삼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게 인삼을 조공품으로 바치라고 요구했다. 명나라 말부터 중국인들의 인삼 수요는 더욱 커져갔다. 조선은 사신단의 비용을 중국에 가서 인삼을 판 것으로 충당하기도 했다.

고려 시대까지 인삼은 산삼이어서, 생산량에 한계가 있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부터 서서히 인삼의 인공재배가 시작되었다. 특히 1724년 개경 사람 박유철 등이 해를 가리는 방법으로 인삼 농사법을 개발해 인삼을 대량으로 재배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서유구(徐有榘 : 1764~1845)가 쓴 [임원십육지 (林圓十六志)]에 제주도를 제외한 전 국토에서 인삼이 분포한다고 할 정도로 인삼 재배는 빠르게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청나라에 대한 인삼 수출은 계속해서 늘어나, 1851년에는 4만 근까지 늘어났다. 인삼이 아편에 찌든 사람들에게 특효라는 소식에 인삼 소비가 빠르게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의주상인 임상옥은 1821년 사신단을 따라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원가의 수십 배로 인삼을 매각하는 등 막대한 재화를 벌기도 했다. 인삼 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조선의 국가 재정에서 인삼을 통해 얻는 수익의 비중은 커져만 갔다. 점차적으로 조선은 인삼을 매개로 일본의 은과 중국의 비단 교역을 키워갔다. 인삼이 일본과 중국을 잇는 동아시아 삼국교역에서 핵심 물품의 위치를 차지했던 것이다.

서양에도 알려진 인삼

16세기부터 아시아로 진출하기 시작하던 서양인들도 조선 인삼의 가치에 대해 적잖게 파악하고 있었다. 17세기 암스테르담 시장을 역임한 학자인 니콜라스 비첸(Nicolaas Witsen)은 그의 저서 [북부 및 동부 아시아 지리지]에서 조선은 ‘인삼’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교역 특산품이 있다고 강조했다.

‘Ginseng’이란 말은 1762년 프랑수아즈에 의해 공인된 말로, 당시 프랑스에서는 고려인삼에 대해 백과전서 한페이지를 할애해 논할 정도였다. 이와 같이 서양인들은 중국에서 조선 인삼의 인기가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이와 유사한 종을 조선 밖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목적은 자신들의 소비가 아닌, 동아시아 시장에 팔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1715년 프랑스의 라피노(Joseph Francois Lafitau) 신부가 캐나다 퀘벡 지역에서 인삼과 유사한 종을 찾아낸다. 또 네덜란드 상인들을 중심으로 다량의 인삼이 애팔래치아 산맥에서 채집되었고, 1740년대에는 중국으로 수출되었다. 물론 효능은 조선의 인삼이 아메리카 인삼보다 더 탁월했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조선의 인삼은 약으로 비싼 가격에 팔렸지만, 월등히 싼 아메리카 인삼은 대중들이 건강식품처럼 구입했다. 아메리카 인삼 탓에 조선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 수출물량을 제한하기도 했다. 조선 홍삼의 1/5 가격의 아메리카 인삼은 1862년에는 무려 286톤(약 48만근)이나 수출되었다. 이것이 결국 조선 인삼의 독보적인 위치를 흔들어 놓았다. 지금도 세계 시장에서는 외국산 인삼들이 값싸다는 이유로 많이 팔리고 있지만, 약효만큼은 절대로 우리나라 인삼을 따라오지 못한다.

하늘이 이 땅에 내려준 귀한 선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특산물인 인삼 덕분에 우리 조상들은 외국과 많은 교역을 할 수 있었다. 만약 인삼의 인공재배가 좀 더 일찍 이루어졌더라면, 고가의 홍삼 수출만이 아니라 저가의 인삼 수출에도 조선이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인삼은 세계 역사를 바꾼 상품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인삼이 없었다면 우리 무역의 역사는 매우 소략했을 것이다. 인삼은 우리 조상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 하늘이 이 땅에 내려준 귀한 선물이었다.



출처 :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